본문 바로가기

벌새 – 조용한 아이가 남긴 흔적들

영화리뷰재밌어 2025. 9. 24.

벌새 – 조용한 아이가 남긴 흔적들은 한 담임교사가 시간이 지난 뒤 되돌아본 기억 속 학생에 대한 기록이다. 그 학생은 목소리보다 시선으로 세상을 이야기했고 고요함으로 존재를 증명했다.

 

벌새 – 조용한 아이가 남긴 흔적들

 

 

기억 속 소녀 은희를 떠올리며

기억 속 소녀 은희를 떠올리며 담임으로서 많은 아이들을 만났지만 유독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은희였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교실이 아닌 집 안 서랍에서 예전 학급 명단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 아래 적힌 이름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되었다. 은희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잘 아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는 흔치 않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자신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기 마련인데 그 아이는 조용히 교실 안 풍경과 자신을 하나로 묶는 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교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학생들의 성향을 빠르게 파악하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은희에게는 선명한 성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흐릿한 감정의 윤곽선 같은 것이 늘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눈빛.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듯한 손끝.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켜버리는 표정. 그 아이는 삶의 어느 시점을 이미 경험한 듯 보였고 나는 그런 은희를 볼 때마다 내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스스로 되묻게 되었다.

 

 

교실이라는 세계에서 소리 없는 싸움을 하던 은희

교실이라는 세계에서 소리 없는 싸움을 하던 은희는 어떤 날엔 책상에 턱을 괴고 창밖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그 시선은 단순한 방심이 아니었다. 그건 명백히 무언가와 맞서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녀는 늘 자신만의 싸움을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교실이라는 공간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떤 선생님들은 그런 아이를 ‘무기력하다’고 정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 숨겨진 긴장을 읽을 수 있었다. 은희는 방어하고 있었고 또한 동시에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욕망 속에 있었다. 그 아이의 하루는 단순히 ‘수업’과 ‘쉬는 시간’으로 나뉘지 않았다. 그건 복잡하고 예민한 감정의 조율로 가득 찬 하루였을 것이다. 나는 그 아이에게 특별한 말을 건넨 기억이 없다. 그저 이름을 한 번 더 불러주거나 손에 들고 있던 연필을 슬쩍 바라보거나 점심시간에 멀찍이 앉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짧은 교류 안에 우리는 무언의 이해를 나누고 있었다고 느꼈다. 나는 이제야 생각한다. 그 아이는 나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작은 바람을 나는 그때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도 남는 감정은 잊히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남는 감정은 익히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교사 생활을 정리한 지금 나는 가끔 은희와 같은 아이들을 떠올린다. 수많은 수료증과 생활기록부가 쌓여 있지만 그 어디에도 적히지 않는 정서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오히려 훨씬 더 생생하게 남는다. 은희는 졸업식 날에도 조용했다. 어떤 학생처럼 교탁 옆에서 사진을 찍자고 다가오지도 않았고 어떤 학생처럼 떠들썩한 포옹을 나누지도 않았다. 그냥 천천히 교실을 한 바퀴 돌아보았고 그 시선을 따라가던 나와 마주쳤다. 그때 나는 웃어야 했는지 인사해야 했는지도 잘 몰랐다. 다만 그녀는 미묘하게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속삭였다. 그 장면은 내 교직 인생의 한 귀퉁이에 조용히 박제되어 있다. 가르침이란 건 꼭 수업과 성적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나는 그 아이에게 배웠다. 그 아이는 침묵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과 세상을 아주 치열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교사로서의 나를 가장 인간적으로 만들어준 순간은 아이들의 정답 있는 질문에 답할 때가 아니라 답 없는 감정을 마주할 때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은희는 그런 감정을 선물했던 아이 중 하나였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었다. 그 아이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가끔 그녀가 남긴 그 조용한 울림을 떠올린다. 그건 어느 누구보다 깊은 감정의 흔적이었고 나는 그 흔적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다행스럽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