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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 왕을 지켜낸 살수의 관찰록

영화리뷰재밌어 2025. 9. 24.

역린 – 왕을 지켜낸 살수의 관찰록은 살수 을수의 시선으로 기록된 감정의 관찰일지다. 죽음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온 자가 목격한 것은 칼이 아닌 인간의 온기였다. 그 관찰은 곧 나의 변화였고 역사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역린 – 왕을 지켜낸 살수의 관찰록

 

 

처음 목격한 자는 사람이 아닌 왕이었다

처음 목격한 자는 사람이 아닌 왕이었다는 사실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분명하다. 나에게 정조라는 존재는 목표였다. 생명을 거두는 임무의 대상일 뿐이었다. 살수로 살아온 세월 동안 나는 사람을 죽이기 전에 관찰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사람은 감정을 보이고 감정은 곧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왕을 처음 마주한 순간 나는 그 눈빛에서 약점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것은 두려움도 오만도 아닌 낯선 ‘침묵’이었다. 그 침묵은 타인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한 궁극의 방어였다. 왕이라는 신분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을 주지만 그 두려움 속에선 자주 인간이 사라진다. 나는 그를 지켜보며 ‘왕의 표정이란 만들어진 가면에 불과하구나’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침묵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스스로의 감정을 절제하고 다스리는 데 익숙한 인간이었다. 나는 늘 명령을 수행할 뿐이었다. 살인자는 감정을 가지지 않는 것이 숙명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정조를 지켜보며 처음으로 마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는 절제와 동시에 온기가 있었다. 궁녀를 대하는 손끝, 신하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 심지어 암살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은 그 모든 것이 ‘인간 정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살인의 도구로 훈련되어 왔다. 그러나 그를 관찰하는 날들이 이어질수록 나는 점점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내가 죽이려 했던 것은 과연 왕이었는가 아니면 권력에 대한 증오였던가.

 

 

칼날 끝에 닿은 건 권력이 아닌 외로움이었다

칼날 끝에 닿은 건 권력이 아닌 외로움이었다. 처음 검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그것은 훈련된 자의 본능이자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직업적 태도였다. 그러나 그의 뒤를 쫓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내 칼날이 겨누는 방향에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는 벽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의 벽, 신하들의 이중적 시선, 무엇보다 가장 두터운 건 ‘왕이라는 존재가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전제’였다. 나는 그 벽을 뚫고 그의 삶을 훔쳐보았다. 숨소리까지 읽는 훈련을 받아온 나는 그의 무심한 얼굴에 묻어나는 피로와 체념을 읽었다. 그 피로는 신하들의 암투보다 백성의 삶보다 더 깊은 외로움이었다. 그는 매일 암살의 위협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겁먹지 않았다. 내가 숨어 있던 회랑을 지날 때도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을 삼키고 직진하는 자의 걸음은 내게 전혀 낯선 움직임이었다. 나는 문득 그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생각이 나를 당황시켰다. 살수에게 지킨다는 단어는 금기였다. 그러나 그는 왕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다. 상처받을 줄 알고 외로움을 느낄 줄 아는 인간. 그 감정을 목격한 순간 내 칼끝은 흔들렸다. 왕은 말했다. “이 나라를 지키고 싶다.” 그 말은 명령이 아니었고 선포도 아니었다. 그것은 슬픈 다짐이었다. 그 다짐은 살수였던 나에게도 파고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칼이 아닌 마음으로 누군가를 본 순간을 경험했다.

 

 

관찰자는 결국 변화를 받아들인 자였다

관찰자는 결국 변화를 받아들인 자였다. 나는 감정을 지워내는 훈련을 반복해 왔다. 기억하지 않기 위해 지우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하지만 정조를 지켜보며 생긴 감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관찰은 때로 관찰자를 변하게 만든다. 그것이 역린이었다. 나는 끝내 그를 죽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를 지켜본 시간은 감정을 남겼고 그 감정은 내게 인간다움이라는 낯선 무게를 안겨주었다. 처음에는 그 무게가 불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무게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조는 내게 말했다. “너는 사람이다” 그 짧은 말 한마디는 모든 훈련과 단절을 무너뜨렸다. 그는 나를 살수로 보지 않았다. 인간으로 누군가의 아들일 수도 있는 존재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 무너졌다. 관찰일지를 다시 펼치며 나는 묻는다. 감정 없는 자로 살았던 나는 이제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이 기록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진실이다. 나는 살수였고 감정을 잃었고 하지만 한 사람을 통해 다시 나를 관찰하게 되었다. 왕을 지키는 것이 옳았는지 그 판단은 시간에게 맡기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한 왕을 통해 인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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