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 – 다시 꺼낸 마음의 조각들
윤희에게 – 다시 꺼낸 마음의 조각들은 윤희의 시점에서 돌아본 삶의 균열과 치유의 여정이다. 오랜 침묵 끝에 꺼낸 말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어떻게 감정을 전이시키는지를 섬세하게 바라본다.
익숙한 고요 속에서 관계는 멀어졌다
익숙한 고요 속에서 관계는 멀어졌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매일같이 반복되던 일상의 고요는 나에게 안정이 아닌 둔감함을 남겼고 나는 그 고요에 묻혀버린 내 감정들을 스스로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딸과의 거리, 전남편과의 공허한 대화, 직장 내 무표정한 관계들과 그 속에서 나는 나조차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다. 삶은 언제부터인가 무채색이 되었다. 주어야 할 말보다 삼켜야 할 말이 많았고 설명보다는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무언가를 설명하는 일은 감정의 입구를 여는 일이기에 나는 자주 닫히는 쪽을 선택해 왔다. 그 선택들이 결국 사람들과의 거리가 멀어졌고 특히 나와 딸 사이의 거리를 더욱 멀게 만들었다.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불확실해졌다.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내 자리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분명하지 않았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커피를 마시는 시간들은 감정을 지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 편지는 내가 묻어두었던 시간과 말하지 못했던 감정에 작은 금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간절했다. 내가 감춰둔 어떤 감정이 시간을 돌아 다시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그 고요 속에서 문득 알게 되었다. 진짜 멀어졌던 건 관계가 아니라 내가 감정을 말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그 순간들이었다. 말하지 않음은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상처로 남게 될 뿐이다. 그 편지를 읽으며 나는 처음으로 감정의 회로를 다시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편지가 되살린 감정의 흔적들
편지가 되살린 감정의 흔적들은 내 기억의 어딘가에 자리 잡은 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하루하루 쌓인 시간 속에서 무뎌졌다고 믿었지만 그 편지는 나를 순식간에 수십 년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잊었다고 믿었던 감정들은 잊은 것이 아니라 그저 고이 감춰놓았던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나는 누군가를 사랑했으며 그 감정은 평범한 연애가 아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결핍과 충만이 동시에 존재하던 감정이었다. 그 감정이 금기시되거나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검열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사랑은 숨겨야 할 것이 되었고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그 사랑을 인정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하지만 그 편지는 내가 그 시절을 살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내가 누군가를 분명히 사랑했고 그 사랑이 나를 사람답게 만들었다는 진실을 되새기게 했다. 그 흔적은 편지 속 문장 하나하나에서 살아 움직였고 나는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잃어버렸던 나 자신과 재회하고 있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처음에는 과거를 마주하는 일이 두려웠다. 하지만 편지를 통해 되살아난 감정은 아프면서도 따뜻했다. 그 감정은 나를 다시 인간답게 만들었고 내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깨닫게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과거를 덮는 일이 아니라 그 위에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는 일이란 사실이었다. 나는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 잊고 있었던 나의 언어와 감정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더 이상 금기나 죄책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나를 다시 삶의 중심으로 데려오는 시작이었다.
닫혀 있던 마음이 천천히 열리다
닫혀 있던 마음이 천천히 열리다는 감각은 어떤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작은 틈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여전히 불안하며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 그러나 그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트이고 삶이 조금은 견딜 만해졌다. 딸은 나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이전보다 훨씬 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기 시작했다. 그 시선은 판단이 아닌 관찰이었고 그 관찰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딸에게 완전한 이해를 바라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 역시 딸을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삶은 그렇게 조금씩 변했다. 과거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이 아닌 그 과거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현재를 함께 살아가려는 방식으로 말하지 못한 감정은 여전히 가슴 한쪽에 남아 있지만 그 감정들이 더 이상 나를 옭아매지 않게 되었다. 편지를 다시 꺼내어 읽는 날들이 생겼다. 그 속의 문장들이 예전보다 더 다정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비로소 회복된다는 것을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는 일,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일 그리고 그 감정 위에 삶을 다시 짓는 일을 그 모든 건 지금의 나로선 여전히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히 가능하다는 믿음은 생겼다. 그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내가 내 감정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윤희에게는 결국 나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그 편지 덕분에 나는 비로소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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