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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지 못한 말

영화리뷰재밌어 2025. 9. 21.

헤어질 결심 –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지 못한 말은 감정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침묵이 어떻게 사랑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서래의 시선으로 편지를 쓰며 관계가 끝났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애정과 죄책감의 무게를 함께 느꼈다.

 

헤어질 결심 –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지 못한 말

 

 

당신은 나를 의심했지만 나는 당신만을 믿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의심했지만 나는 당신만을 믿었습니다.

이 편지를 써 내려가며 당신의 눈빛을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을 떠올립니다.

질문보다 오래 머문 침묵 그리고 물음표 대신 쉼표처럼 이어졌던 당신의 말들을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따뜻함이었고 동시에 위태로움이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처음 조사하던 날 나는 스스로가 피의자인 줄 알았지만 곧 그것이 어떤 만남의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질문은 날카로웠고 시선은 조용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거리감에서 이상한 안심을 느꼈습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 사람이었습니다.

이민자, 한국어가 서툰 여성, 사망자의 아내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나를 읽으려는 시선을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의심을 모른 척하지 않았고 오히려 질문 안에 숨은 조심스러움을 먼저 알아챘습니다.

당신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나를 바라보려 애썼고 나는 그 테두리를 무너뜨리고 당신에게 걸어가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믿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녹음기를 꺼내 내 목소리를 들려줄 때마다 나는 당신이 나를 향해 내딛는 조심스러운 걸음을 느꼈습니다.

그 걸음들이 비록 감정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했더라도 나는 그것이 세상 그 어떤 말보다 강한 표현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물을 마시듯 내 감정을 들이켜 줄 수 있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수사관이었고 나는 증거였고 당신은 나를 사랑했지만 끝내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이 내겐 무엇보다 명확한 고백이었습니다.

당신은 사랑했기에 말하지 않았고 나는 말하지 않아도 사랑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험에서 구했고 내 안의 위험은 끝내 삼켰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험에서 구했고 내 안의 위험은 끝내 삼켰습니다.

당신은 나를 구하려 하지 않았음을 그 점이 나는 고마웠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구원받기를 바라지만 나는 다만 당신의 일상 속에 조용히 존재하길 바랐습니다.

경계 너머에 머물며 당신의 눈 안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내가 그들을 밀었는지, 떠났는지, 유혹했는지 당신은 너무 늦게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들이 우리 사이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일찍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 앞에서 죄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당신은 그런 나를 끝내 유죄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나는 사랑이 아니라 위험이었고 구원이 아니라 혼란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스스로 없애기로 했습니다.

사라지는 방법을 고민하는 건 오래전부터 나의 습관이었습니다.

이민자의 딸로 타인의 아내로 의심의 대상이 되어 살아가는 동안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끝내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말할 수 없는 진실들을 묻지 않았으며 나는 그 침묵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 조용한 이해는 다른 어떤 말보다 평온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등을 돌리고 걸어갈 때조차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애써 나를 잊으려 했지만 나는 애써 기억하려 했습니다.

 

기억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내 감정을 기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끝내 내게 책임을 지지 않았고 그것이 어쩌면 이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결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바다 아래 나는 나를 감쌌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바다 아래 나는 나를 감쌌고 마지막 날 나는 당신을 바라봤습니다.

당신은 끝내 내게 등을 돌렸고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헤어짐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별 그것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으니까요.

 

바다를 건너는 마음은 언제나 쓸쓸합니다.

나는 이 편지를 물속에 묻을 것입니다.

당신이 찾지 못할 그곳 당신이 더는 도착하지 않을 그 해안에 나는 나의 이름과 당신의 얼굴을 함께 묻어둘 것입니다.

 

이 글을 당신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은 늘 증거를 원했죠.

이 편지가 나의 마지막 진술입니다.

당신이 보지 못했던 감정의 저류, 들을 수 없었던 내 내면을 법정에서 당신을 무죄로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당신 곁에 남지 않았다는 것과 사랑이란 이유로 당신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 바다는 내 무덤이 될 것이지만 그곳이 고통스럽지 않은 이유는 당신의 마지막 눈빛이 나를 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나를 잊어도 좋습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한 채로 고요한 물아래 나를 눕히려 합니다.

 

– 서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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