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왕이 된 남자 – 공간이 말한 두 개의 진실
광해, 왕이 된 남자 – 공간이 말한 두 개의 진실은 미술감독의 시선으로 바라본 왕좌의 이면이다. 장면을 구성하는 색과 구도는 캐릭터의 감정보다 더 많은 진실을 말한다. 나는 그 진실을 공간 위에 설계했다.
궁궐의 대칭은 이상이 아닌 통제를 의미했다
궁궐의 대칭은 이상이 아닌 통제를 의미했다는 사실을 나는 이번 작업에서 다시 체감했다. 많은 이들은 왕의 공간을 완벽하게 구성된 아름다움이라 말하지만 나에게 그 대칭 구조는 오히려 체제 유지의 강박이자 권력의 위엄을 시각적으로 세뇌시키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읽힌다. 광해군의 처소를 설계할 때 나는 완벽한 대칭을 가장 먼저 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시대적 고증과 정치적 현실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대칭을 유지한 채 그 안에 균열을 심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예를 들어 왕의 자리 뒤에 배치된 병풍의 색감은 처음과 마지막에서 약간의 채도 차이를 뒀다. 관객이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의 미세한 차이지만 그 변화는 왕의 동일성을 깨뜨리는 데 충분한 긴장감을 제공한다. 하선이 처음 궁에 들어설 때 나는 그가 마주하는 모든 공간이 비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보다 더 긴 복도, 더 높은 천장, 의도적으로 크기가 과장된 창살의 그늘은 하선의 시야를 압도하도록 설계했다. 그 시야는 곧 관객의 감정이기도 하다. 그 공간은 그가 통치자가 아니라 통제의 구조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존재임을 상징한다. 궁궐의 정문은 일반적으로 가장 엄격하게 대칭 구조를 따르는 장소이다. 나는 그 문을 통과하는 장면에 최대한 정적인 카메라 무빙을 요청했고 배경 미술에서는 모든 돌바닥의 패턴이 일정하게 반복되도록 했다. 그러나 하선이 그 문을 나서는 순간에는 의도적으로 비정형의 연못이 프레임 안으로 삽입되게 설계했다. 질서와 무질서, 현실과 허구의 간극이 바로 그 지점에서 충돌하길 바랐다.
색의 전환은 권력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장치였다
색의 전환은 권력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장치였다. 나는 미술감독으로서 왕실 내부의 색채 배치를 단순한 미적 구성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색은 감정의 밀도, 권력의 이동,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시각적 언어로 작동했다. 초반부 광해가 등장할 때 공간의 톤은 냉정하고 푸르다. 왕의 처소는 차가운 남색과 흑갈색의 대비 속에서 긴장감을 형성하며 그의 의복 또한 무게감 있는 비단과 어두운 계열로 설계되었다. 이 색들은 왕이 느끼는 공포와 불신, 피로감의 시각적 상징이었다. 광해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봉인하고 있었으며 그 봉인은 차가운 색으로 응축되었다. 반면 하선이 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서 나는 따뜻한 색을 점진적으로 삽입했다. 처음에는 작은 붉은 조각보 하나 그다음에는 밝은 조명 아래 놓인 창호지 너머의 연등 그리고 궁녀들이 드나드는 공간에 등장하는 연한 주황빛 커튼. 이 모든 색의 변화는 권력의 질감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선은 통치자가 아니었고 정치를 두려워했지만 그의 존재는 궁궐에 사람의 온기를 불어넣었다. 영화 중반 하선이 백성의 고통을 듣고 분노하는 장면에서 나는 조명팀과 협업해 기존 공간의 조도를 낮추고 유일하게 붉은빛이 흐르는 자개장을 배경으로 배치했다. 그 장면에서의 붉은빛은 피의 상징이 아니라 정의와 생명력의 은유였다. 그가 말하는 왕의 책임은 이미 색의 언어로 화면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광해가 궁으로 복귀한 후 나는 다시 푸른 색조로 복원했지만 그 복원은 이전보다 더 어둡고 폐쇄적인 톤이었다. 그 공간은 이미 생명력을 잃었고 하선이 남긴 온기는 권력에 의해 삭제되었다. 그러나 관객은 색을 통해 그것이 삭제된 감정임을 기억하게 된다. 색은 진실을 말하고 진실은 언어보다 먼저 스며든다.
무대는 허구였지만 감정은 진짜였다
무대는 허구였지만 감정은 진짜였다는 사실은 이 작업을 마친 후에도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다. 궁궐의 한 채, 회랑의 곡선, 연회의 좌식 구조 하나까지 모든 것이 세트였고 재현이었으며 현실의 모사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쌓인 감정은 허구를 넘어서 있었다. 나는 세트 디자인을 하며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이 진짜처럼 보이게가 아니었다. 오히려 진짜로 느껴지게 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모든 세트는 상징을 우선했고 사실은 그다음이었다. 창호의 문양이 왕의 인격과 닮아 있어야 했고 벽면의 장식이 통치의 긴장을 품고 있어야 했다. 그 작은 디테일들이 배우의 연기와 충돌하면서 허구였던 공간이 진짜가 되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다. 연회의 장면은 특히 인상 깊다. 화려한 등불과 잔치의 배치 화문석과 병풍의 패턴까지 모든 것이 기쁨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그 장면에서 배우들의 감정은 불안과 위선이었다. 나는 관객이 그 이질감을 인식하도록 일부러 색과 동선을 배치했다. 배우의 얼굴과 배경이 조화를 이루지 않게 했고 행렬의 동선이 의도적으로 삐걱거리게 설정되었다. 그 작은 이질감이 감정의 진실을 드러냈다. 왕좌는 무대의 중심이었지만 그 자리에 앉는 이는 언제나 가장 외로운 존재였다. 나는 그 외로움을 시각화하기 위해 왕의 자리를 둘러싼 공간을 비워두었다.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게 침묵이 울릴 수 있도록. 나는 미술감독으로서 단 한 가지를 믿었다. 세트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감정이 거기에 존재할 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는 일 일 뿐이다. 그 자리에 하선이 있었고 광해가 있었으며 그 두 얼굴을 바라보는 관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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