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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 하늘에 묻는다 – 우정과 진보 사이의 균열

영화리뷰재밌어 2025. 9. 22.

천문: 하늘에 묻는다 – 우정과 진보 사이의 균열은 내가 감독으로서 깊이 고민했던 영화다.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단순한 위인 서사가 아닌, 인간적 신뢰와 시대적 한계의 교차점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빛보다 그림자가 더 진했던 시대의 두 사람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는가.

 

천문 하늘에 묻는다 – 우정과 진보 사이의 균열

 

 

세종과 장영실 사이엔 권력보다 신뢰가 있었다

세종과 장영실 사이엔 권력보다 신뢰가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위인들의 위대함을 기념하고 싶은 마음보다 두 인간이 서로를 어떻게 믿었는가를 더 알고 싶었다. 역사는 종종 업적을 기록하지만 나는 그 기록 너머에 있는 말하지 못한 감정들 오해, 침묵, 고독 같은 것들에 마음이 갔다. 카메라를 들고 세종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는 언제나 장영실을 단순한 기술자로 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장영실을 국가의 ‘도구’로 쓰기보다 함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동료로 바라보았다. 감독으로서 나는 그런 시선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이자 동시에 가장 깊은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세종의 고뇌를 조명할 때 왕이라는 위치보다는 한 사람의 불안한 내면을 먼저 보려 했다. 그는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고 장영실이 사고를 당한 이후 더욱 혼란스러운 인간으로 무너져갔다. 신뢰가 무너질까 두려운 왕 그 신뢰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지는 장영실. 나는 이 둘 사이의 균열을 ‘사고’라는 사건 하나로 환원하고 싶지 않았다. 장영실의 침묵은 기술자의 침묵이 아니었다. 그건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고자 한 인간의 방어기제였고 나는 그 침묵을 하나의 언어처럼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그가 말을 줄여갈수록 화면 속 조명은 어두워졌고 나는 점점 그의 마음에 접근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둘의 대화는 줄어들었지만 그 줄어듦이야말로 둘 사이의 진심을 보여주는 방법이 되었다. 세종은 ‘너는 내 사람이야’라는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 시간이 권력과 우정이 가장 정확히 교차하는 장면이라고 느꼈다. 내가 가장 두려웠던 건 관객이 이 둘의 이야기를 단순히 ‘역사의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교훈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내미는 손의 온기를 그리고 싶었다. 그건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감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믿음은 늘 다른 리듬으로 흘렀다

과학과 믿음은 늘 다른 리듬으로 흘렀다. 장영실이 만든 기계들은 정밀했고 오차 없이 작동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그렇지 않다. 왕의 사랑, 신하의 충성, 인간의 욕망 그 모든 것들은 예측할 수 없는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나는 이 영화에서 바로 그 불일치의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장영실이 해시계를 설치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나는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소리와 공기의 흐름에 더 집중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은 기술이 공간을 점유하는 장면이 아니라 그 기술을 만든 인간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무언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나는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가?" 감독으로서 나는 장영실의 고독에 자주 마음이 기울었다. 세종이 그를 인정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면 그 외의 모든 시선은 경계와 의심이었다. 나는 장영실의 손이 그 모든 시선을 피해 가는 듯한 연출을 택했다. 기술은 눈부셨지만 그 눈부심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기에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기계는 늘 정확한데 인간의 신뢰는 늘 모호하다는 이 역설은 내게 영화를 만드는 내내 압박처럼 작용했다. 그래서 나는 영화 곳곳에 ‘정확한 메커니즘’과 ‘흐릿한 감정’을 병치하려 했다. 기계의 윤곽은 선명하지만 그 안에 담긴 장영실의 감정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모호함이야말로 인간의 진실이라고 나는 믿었다. 나는 믿음과 과학이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다는 걸 이 영화를 만들며 체감했다. 왕은 기술을 원했고 장영실은 진심을 원했다. 그리고 그 간극은 시대의 탓이기도 했지만 결국 인간의 이해 불가능성에서 비롯되었다. 과학은 하늘을 측정하려 하고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가늠하려 한다. 하지만 하늘도 사람도 측정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그걸 말하고 싶었다.

 

 

침묵과 단절은 가장 깊은 고백의 방식이었다

침묵과 단절은 가장 깊은 고백의 방식이었다. 세종과 장영실이 끝내 만나지 못한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어떤 대사보다 그 둘 사이의 거리와 정적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믿었다. 감독으로서 나는 항상 말한다. 진짜 감정은 대사가 아닌 ‘멈춤’에서 생긴다고. 세종은 장영실을 다시 부르지 않는다. 장영실은 세종을 다시 보지 않는다. 하지만 둘 다 서로를 끊임없이 기억한다. 나는 그 ‘기억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관객에게 오래 남기고 싶었다. 침묵은 미안함의 다른 표현이고 단절은 사랑의 한 방식이다. 나는 그걸 이 이야기에서 처음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말을 하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장영실이 사라지고 난 후 세종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을 연출할 때 나는 그 시선이 질문이 아니라 기도였다고 느꼈다. 관객이 이 영화에서 어떤 정리된 감정을 얻길 바라진 않았다. 나는 오히려 감정의 잔향이 오래 남기를 원했다. 답을 주는 영화보다 질문을 남기는 영화가 더 오래 가슴에 남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엔 음악을 거의 없앴고 배경을 절제했고 배우의 표정도 카메라에 지나치게 담지 않았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여백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고백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우리는 말보다 더 조용한 방식으로 그 마음을 드러낸다. 이 영화가 그 조용함을 품을 수 있다면 나는 감독으로서 충분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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